[서평]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 : 윤정모

Photo of author

By boboranun

잊어선 안되는 그 날의 기록들…

그곳에엄마가있었어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육신의 주인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정신만 확고하고, 그 정신이 순결하다면 그사람은 순결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그 말 하나에 의지하면서 그 지옥을 견뎌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만 머물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는 과거가 있기에 있는 것이고 미래는 과거에 거쳐 현재에 다다랐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잊어선 안되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있었고, 아직 사과조차 받지 못했으며, 이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단지 지금에 적응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일뿐, 추악한 본능은 언제든 다시 살아나기 마련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응모할 때, 망설였다. 나는 적극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애국심이 있고 용서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생각만 하는 내가 이 글을 읽었을 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몰라서도 잊어서도 안되는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글이기에 용기내어 읽어 보았다.

작가는 책내용을 생각보다 담담하게 풀어내었다. 그래서 글의 내용이 좀 더 각인되는 느낌을 받았다.

독백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용을 풀어나가는 주인공에서 아버지에서 어머니, 마지막으로 위안부들까지.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독백이 들리며 장면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책 본문 내용 중 p169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을 빠짐없이 다 얘기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내 아들이 아닌 소설가여야 한다. 소설가는 이 얘기를 객관적으로 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겠니?” 라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솔직히 책을 읽으며 주인공은 왜 이렇게 모든 일에 객관적인가. 불같이 뜨겁지도 물같이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뜻미지근하지도 않은.

꼭 타인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타인이긴 타인이지만 완전 타인이 아닌 이야기들인데 말이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 덮고 난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 객관적으로 풀어내곤 있지만 담담한 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위해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읽는 나도 더 사실적인 근거를 기억에 새기며 읽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이 책은 참혹했던 시절의 이야기 이다. 그 시대의 젊은이의 삶은 어떠했는지, 전쟁에 끌려간 남자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여자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위안부로 어떤 지옥이 펼쳐졌는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가 한번쯤은 읽고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민족이 어떤 과거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서 현재에 왔는지.

너무 자세하고 세세하지 않아 더 잘 읽히지 않았나 싶다. 끔찍했던 그날의 이야기들이 너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면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을까.

많은 생각이 들게끔하는 책이었다. 그 시대의 내가 살았다면 버텨낼 수 있었을까?

✒️p28 그 거대한 시위에 나는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관심도 상관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일로 후회가 되었던 적은 있었다.

열정적이고 용감한 사람들이 많다. 그릇되다 느끼는 일에 나서서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잘못되었다’ 는 생각이 드는 일에 화를 내지만 오롯이 나 혼자 화를 내는 것이지.

소수 또는 다수를 위해 같이 화를 내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때때로 불합리한 일을 보았을 때, 내가 나서지 못할 것 같은 자리엔 앞자리를 자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며 이 문구를 보았을 때, 내 양심에 찔렸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어제 내가 이 책을 완독하였던 날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위안부 관련 책을 소개하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였지만,

결국은 광복절인 8월 15일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런 나에게 많이 아쉬운 기분이 든다.

비록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무언가를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순 없으나,

이 책을 기록으로 남김으로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그 일들이 잊히지 않길, 반복되지 않길 하는 마음으로.

✒️p67 “결국 시간이 해결한다, 그 말이지?” “아니,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자연밖에 없어. 인간의 개명에는 준비가 필수야. 수레에 담긴 것도 준비의 결과물이지.”

일본은 시간이 해결한다고 생각해서 사과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잘못임을 알지만 시간이 지나 잊혀질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린 히틀러를 잊을 수 있는가. 그가 행했던 일들을 잊을 수 있는가. 이제와서 떳떳하다 말할 수 있는 일들이었던가.

일본군에 끌려가 전쟁에서 버티며 그 버티는 시간에도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한 기회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대의 삶들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겠지. 일본군이 이기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조국을 잊어선 안된다. 우리가 누구임 잊어선 안된다는 그 마음이.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해결해주는건 아무것도 없다. 내 나이가 들며 뼈져리게 느끼는 말이다.

변화를 위해선 생각에서 그치면 안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행동이야 말로 해결 방법이다.

✒️p89 왜놈들이 붙인 이름 ‘삐’는 영어로 창녀를 뜻하는 프로스티튜트(Prostitute)의 앞 글자 ‘피(P)’를 따온 말인 것도 아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죄의식 없이 마주할 것인가.

‘조센삐’의 뜻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알게된 단어다. 위안부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조센삐라 불렸다니 거기다 그 뜻이 창녀라니.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거짓된 일자리로 현혹하고 납치하여 행했던 추악한 일을 창녀라 칭하며 ‘조센삐’로 칭하며 낄낄거렸다니. 이 글을 적으면서도 너무나도 화가 난다.

조센삐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검색해 보았다.

“나무위키 : 조센삐의 어원”

삐는 일본군에서 위안부를 가르키는 속어로 사용되었는데 원래 삐는 일본어가 아니라 중국어이다. 유래는 중국어로 여성의 생식기를 부르는 속어인 삐(屄)[1]에서 유래되었다. 일본군에서 특정지역 출신지의 위안부를 부를때 출신지 명칭에 위안부를 가르키는 속어인 삐를 합성해 위안부를 ‘~삐’라는 식으로 불렀는데, 이중에서 조선인 위안부를 조센삐라고 불렀다.

책의 마지막부분에는 위안부들의 기록이 적혀있는데 그들은 하루에 최소 20명에서 많게는 90명까지 상대했다고 한다.

여자 한명이 하루에 20~90명의 군인들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 숫자인가. 말이 되는 일이었는가.

그 지옥같은 일들을 견뎌내던 그들에게 그들이 한 짓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었고, 사과받지 못한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뭐라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한 나는 알지도 못하는 고통임을. 함부로 위로할 수 없는 일임을.

✒️p170 사람에겐 육신과 정신의 주인이 각각인 경우가 있다고, 노예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지만 육신의 주인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정신만 확고하고, 그 정신이 순결하다면 그사람은 순결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그 말 하나에 의지하면서 그 지옥을 견뎌냈다.

사실 ‘에필로그 : 일본군 위안부들의 증언’을 읽기 전엔 그나마 담담하게 책을 읽었다.

주인공의 독백, 아버지의 독백, 어머니의 독백을 읽으며 너무 객관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지만 더더욱 그 상황이 그려짐에 나름 담담하게 읽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필로그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나고 너무 대단하다고도 느꼈다.

그 지옥에서도 내가 ‘나’임을 잊지 않고, 조국을 잊지 않고 버텨내었다는 것이.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니지 않을까. 평안한 삶은 아는 내가? 조금의 고난도 힘들어 하는 내가?

거기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사람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 과연 정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내가 분노했던 부분은 같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위안부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살아남기 위해서 장사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말 하나에 의지하면서 그 지옥을 견뎌냈다.’ 라는 대목에서는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과연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더불어 피폐해지는 환경속에서 정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p335 패전 후에도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죽음의 동반자로 몰살시키고자 합니다. 적군에게 넘어가면 자기들의 죄악상이 드러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정말 끔찍하고도 지독하지도 않은가. 자기들의 죄악상이 드러나는게 두려워 몰살시킨다니.

죄악임을 알면서도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잊고 현재를 위안 삼아 산다면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는가.

또 다시 이런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이라는 이름은 언제 어디서나 추악하고 더러우며 끔찍하다. 산 지옥이다.

잊지말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전쟁이 어떠한 얼굴인지.

Leave a Comment

error: Content is protected !!